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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세계역사와 성경역사를 통으로,통박사 조병호의 <성경과 5대제국>

 

 

 

 

  애굽 EGYPT
 일단,애굽은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부터 등장하는 나라입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민족이라는 단위도 없을 때 요셉을 의지하여 야곱의 대가족 70명이 애굽에 내려간 그저 한 족장 집안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갈 것을 명령하시고 큰 민족을 이룬 후에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겠다는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입(入)애굽과 출(出) 애굽은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다.
애굽 총리 요셉과 애굽
 성경에 애굽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바로 요셉과의 관련 때문이지요.
요셉이 애굽 왕 바로(파라오)의 꿈을 해석하고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애굽 역사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이 풍년 관리와 흉년이란 국가 재난 관리를 통해 고대 근동에서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축업 천재인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애굽에 내려와 당시 애굽에서 가증히 여겼던 목축업이 아닌, 당시 최첨단 산업인 농업에서 또다시 천재성을 드러냅니다. 농업의 가장 핫이슈인 풍년과 흉년을 말하고, 곡식 저장의 지방 분권을 내놓아 전국적 안정을 도모하는 매뉴얼을 제시했으니, 바로가 그를 총리로 삼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창세기 끝과 출애굽기의 시작은 공기부터 다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새 왕의 출현은 히브리인을 긴장시켰고, 놀랄 만큼 불어난 히브리인의 숫자는 애굽을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국의 시동을 걸고 있던 애굽은 근동의 주변 국가들보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자국 내의 히브리인에 대한 대책을 먼저 세우기로 마음먹습니다.
 제국 애굽의 추락:홍해 사건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그들의 병거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출 14:24-25)
 오늘날도 최신예 전투기 1대만 손실해도 군에 큰 타격이 될 텐데, 나라의 모든 전투기를 하루아침에 다 잃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국을 꿈꾸며 군사력 증강에 힘썼던 애굽은 그 새벽에 그렇게 한꺼번에 모든 군사력과 나라의 중요한 인력인 장관들과 야망을 홍해에 수장하고 만 것입니다.
 애굽의 그 위력적이었던 병거들이 홍해에 수장되고, 애굽 경제력의 마력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던 남녀 120만 명 이상의 무임금 노동력을 다 내보낸 후, 애굽은 더 이상 고대 근동의 두려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홍해 사건은 그들의 제국주의를 한풀 꺾게 만들었고, 500년 후에는 이스라엘에게 공주를 바쳐 혼인관계를 맺는 나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은 근동의 한 세력으로 무시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앗수르 제국 ASSYRIAN EMPIRE
 19 세기까지도 앗수르의 유적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혹시 '앗수르'역사가 지어낸 이야기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나 1:8)
'범람한 물'이 바로 앗수르 유적의 키워드입니다. 티그리스 강의 강물이 니느웨를 덮어 그 위에 토사가 쌓여 있었기에 니느웨는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B.C.8세기)와 앗수르
 요나서는 앗수르와 관련된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불러 북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키고 그들을 구원해주시겠다는 말씀은 주시지 않고, 오히려 적국 앗수르로 가서 그들의 수도 니느웨 백성에게 심판을 선고함으로써 그들을 구원할 계획을 전하라니 요나가 도망가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요나의 전도를 통해 구원을 받은 앗수르는 이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제국주의의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질주를 계속하다가, 150년 후 나훔 선지자에 의해 결국 '앗수르의 멸망'선포를 듣게 됩니다.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선지자와 앗수르

 선지자가 등장했다는 것은 일단 그 시대가 악했다는 증거지요. 오므리와 아합 왕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오므리와 그의 아들 아합 왕 때에 북이스라엘은 경제력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습니다. 이때 아합의 부인 시돈의 공주 이세벨은 온 나라를 휩쓸며 바알과 아세라 산당을 짓고,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야와 각을 세우고 엘리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니 엘리사가 엘리야의 뒤를 잇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가졌던 영감의 두 몫을 받은 엘리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도 죄악의 길에서 도대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그가 바로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 선지자입니다.

 북이스라엘의 19번째 왕이자 마지막 왕이었던 호세아가 왕이 된 지 9년째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합니다. B.C.722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200년 만에 이렇게 나라의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에 이어 남유다에도 소손을 뻗어 그들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히스기야는 25세에 남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합니다.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에게 보낼 조공으로 금 30 달란트가 없어서 성전 문과 기둥에 입힌 금을 벗기고 있다니, 히스기야 시대의 경제형편이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다윗 시대와 비교하면 확실히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사 37:36)

 폴 존슨은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인용하면서 이 사건을 쥐들이 전염시킨 '페스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모든 군인들이 죽자, 앗수르 왕 산헤립은 니느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돌아가서는 자기 아들들에게 칼로 살해를 당하고 맙니다. 그러면서 앗수르의 국력은 무서운 속도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바벨론에 의해 이미 점령되어 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나훔의 예언대로 홍수로 물이 범람해 도시 위로 6m나 토사가 쌓여 B.C.609년부터 A.D.1846년까지 , 2450년 이상 그 존재를 깊은 땅 속에 묻어두게 됩니다.
  바벨론 제국 BABYLONIAN EMPIRE
 히스기야가 병에 걸렸다가 나았다는 소식에 바벨론 왕은 남유다에 특사를 파견합니다. 바벨론 특사의 방문에 크게 감동한 히스기야 왕은 크게 감동하여 자진해서 보물창고와 무기고와 국내의 비밀들을 다 보여줍니다. 바벨론 특사는 속으로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앗수르의 군대를 무찌른 무기라도 있을까 생각했는데 남유다의 실상이 너무나도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특사는 정치일정을 잘 마치고, 그러나 실제로는 남유다를 잘 정탐하고 돌아갔습니다. 앗수르를 물리친 바벨론은 남유다와 애굽을 치기 위해 내려올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바벨론은 3번에 걸쳐 남유다 백성을 포로로 끌어갑니다. 1차 포로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 즉 4명의 천재 소년들을 잡아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2차 포로는 에스겔과 예루살렘의 소위 고위 연봉자들, 머리 좋은 우수 인력 1만 명을 끌어간 것을 말합니다. 1차 포로들은 느부갓네살의 '인질교육'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서였고, 2차 포로들은 바벨론 성을 세계 제1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최고 기술자들을 끌어간 것입니다. 3차 포로는 예루살렘에 포도 농사나 지을 최소한의 인력만 남기고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을 잡아간 것입니다. 이들은 주로 하급 단순 노동에 투입되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 때처럼 바벨론에서도 느부갓네살 왕의 꿈 사건이 터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의 꿈을 통해 앗수르 제국의 끝을 본 다니엘에게 바벨론 제국의 끝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 고약했던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고백하고 이 사건으로 바벨론에서 다니엘과 새 친구들의 출셋길이 크게 열리게 됩니다.(다니엘서 2:19-23 참고)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바벨론에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

 북이스라엘이 망한 지 150년여 만에, 남유다도 비참하게 나라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렇게 남유다를 향해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부탁했던 것입니다. 남유다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친바벨론주의자이고,매국노라고 미워하며, 폭행하고, 감금하기까지 합니다.
 예레미야는 힘을 내서 바벨론에 끌려간 백성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기 시작합니다. 그 편지는 다행히 다니엘의 손에 들어갑니다. 예레미야의 편지를 받은 다니엘이 바벨론에서의 포로기간이 70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바벨론은 제국들 가운데 가장 짧은 수명인 70년 만에 제국의 깃발을 내리고 맙니다.(B.C.539)

  페르시아 제국 PERSIAN EMPIRE

 페르시아 왕은 다시 1차, 2차, 3차에 걸쳐 남유다 백성을 귀환시키는데 그 귀환과 성경은 싶은 관련이 있습니다.

 1차 귀환 때에 돌아온 남유다 사람들이 성전을 건축하려다가 방해하는 세력이 있자, 16년간이나 성전건축을 중단했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때 성전 건축을 다시 독려한 선지자가 바로 '학개'와 '스가랴'입니다.

 그리고 2차 포로 귀환의 지도자는 학사 에스라입니다. 그리고 3차 포로 귀환의 지도자는 총독 느헤마야이고요.

 페르시아 왕 고레스(키루스 2세)는 조서를 내려 이렇게 이릅니다.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베들레헴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은 참 신이시라.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유다 베들레헴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스 1:1-4 참고)

 고레스는 후에 고레스 대왕으로 불리게 되고 페르시아 백성은 고레스를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리디아의 크로이소스를 통해 그리스의 철학과 학문을 접하게 된 고레스는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갖추게 되었고, 앗수르 제국의 혼혈주의나 바벨론 제국의 인질 교육 정책과는 다른 관용의 정책을 펴기로 결심하지요. 그래서 점령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끌려온 인질들을 각 나라로 돌려보내는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1차 포로 귀환의 지도자는 페르시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한 스룹바벨입니다. 다리오(다레이오스)는 스룹바벨에게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룹바벨은 다리오가 왕이 되기 전 하나님께 맹세한 것을 지켰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다리오가 이 일을 좋게 여기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하고 성전의 모든 기물들을 반환하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2차 포로 귀환이 있은지 79년 만인 B.C.458년 제사장 에스라의 인도로 2차 포로 귀환이 이루어집니다. 페르시아의 왕 아닥사스다가 율법에 정통한 대단한 학자이자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직접 내린 공문이 에스라서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페르시아에 있는 유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에스라가 데려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무한 신뢰를 받으며 뛰어난 행정가이자 월등한 실력을 갖춘 느헤미야는 총독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와 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마칩니다.

페르시아 제국도 206년만에 다리오(다레이오스 3세) 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제국의 깃발을 내리고, 헬라 제국이 역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헬라 제국 HELLENISTIC EMPIRE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전쟁을 하는 동안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의 속국이었습니다. 필립포스 2세는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 후 강력한 군대를 기반으로 그의 아들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와 전쟁을 위한 새로운 명분을 내세우고 페르시아를 보복하기 위해 마케도니아 중심으로 그리스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전쟁의 명분은 바로 150년 전의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략에 대해 보복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필립포스 2세가 갑작스럽게 암살당하여 죽게 되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23세의 젊은 나이에 나라를 물려받게 됩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로 가서 이수스 전투를 치르며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나 도망친 다리오(다레이오스 3세)를 추격하지 않고 이집트를 점령하기 위해 말머리를 아래로 향했습니다. 알렉산더가 이집트로 향하자, 대부분의 나라들이 저항을 포기하며 속속 알렉산더에게 항복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르시아 전체를 점령한 알렉산더는 동방으로 원정을 계속했습니다. 고대 동방의 문화를 오리엔트 문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오리엔트 문화와 그리스 문화를 합하여 헬라문화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헬레니즘'입니다.
 알렉산더가 죽자, 큰 제국은 그의 7명 장수에 의해 나뉘어 다스려지다가, 권력 싸움에 의해 3 명은 도태되고 4명의 장수가 분할 통치를 하게 됩니다.
 B.C.301년, 이집트 지역을 다스리게 된 프톨레미 1세에 의해 유대는 프톨레미에 합병되고 그 이후 유대에 대한 통치가 셀루커스 왕조로 넘어가게 되자 유대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으로까지 가게 됩니다.
 셀루커스 왕조는 B.C.142년 세금을 면제해주는 방식으로 유대의 독립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때 시몬 마카비가 유대 대제사장의 자리에 오르면서 유대 통치자의 자리를 겸하게 됨으로써 독립국가의 면모를 확고하게 갖춥니다. 이것이 다윗 왕조와는 다른 유대의 또 다른 왕조인 '하스몬 왕조'의 시작입니다. 이때가 바로 유대가 페르시아와 헬라제국에서 440년만에 독립을 이룬 때입니다.
 B.C.63년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 되고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로마 제국 ROMAN EMPIRE
@로마와 관련된 성경@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27권 전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