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은 인간이 처한 본질적인 조건이다. 동물도 질병에 걸리기는 하지만, 병에 빠지는 것은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1부 상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우리는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개성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얼굴을 통해서 그 사람의 개성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P선생에게는 얼굴이 전혀 그런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얼굴의 겉모습도, 얼굴 속에 들어 있는 내면의 개성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P선생은 내면적인 인식불능증에 걸렸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경우에는 영상을 만드는데 필요 불가결한 분명한 결함이 있었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그는 이미 꿈을 시각적으로 꾸지 못했다. 꿈속에서조차 모든 게 비시각적인 것으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궁금해졌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생활하는 것일까? 그의 아내에게 물어보자, "그이는 입으려던 옷이 뭔지 잊어버려요. 자기 몸조차도 알아보지 못한답니다. 그이는 모든 걸 노래를 부르면서 해요. 먹을 때도, 옷을 입을 때도, 목욕할 때도 말이에요. 뭘 하든 노래를 부르면서 해요. 노래를 부르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점진적인 악화에도 불구하고 P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을 가르치며 살았다.
나중에 그의 아내에게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학생이 얌전히 앉아 있으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미지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이 몸을 움직이면 "너 칼이구나.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 하며 금방 누군지 알아맞히곤 했다는 것이다.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우리는 P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이다.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지극히 특수한 시각적 '인식 불능증'의 예이다.
<길 잃은 뱃사람>
만약 기억의 대부분을 잃어버린다면,그래서 자신의 과거를 잃어버리고 현재 자신이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그 사람에게는 어떤 삶, 어떤 세계, 어떤 자아가 남게 될 것인가?
내가 전에 맡았던 환자 중,기억상실증 증세가 있는 지미 G.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기억력을 검사한 결과 특이하게도 바로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억을 새겨두는 기능이 약해서 기억이 금세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의 기억력은 고작 1분 정도에 머물렀다. 뭔가 강한 자극을 주어서 그의 주의를 흩뜨리는 경우에는 1분도 안되어 기억에 새겨두었던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형이 기억하기로 지미는 해군에 있을 때에는 아주 안정된 생활을 했지만 1965년 제대한 다음부터 약간 이상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생활의 안정을 주던 구조이자 닻의 역할을 하던 것이 없어지자 무기력해지면서 '산산조각이 나고'말았다. 폭음을 하게 된 이유도 거기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애타게 뭔가를 하고 싶어했다.뭔가를 하고 싶고, 뭔가가 되고 싶고, 뭔가를 느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놓을 수 없었다. 그는 의미나 존재 이유를 갈망했다.
나는 성당에 가보았다.그리고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한 가지 일에 골똘하게 정신을 집중하는 지미의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는 본 적도 없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성체를 혀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성스러운 종교의식을 추호도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그의 마음은 미사의 정신과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분명히 지미는 정신 집중에 몰두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연속성과 현실성을 되찾았던 것이다.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
수술 당일에 크리스티너의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발밑을 보지 않고는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눈을 잠시라도 떼고는 뭔가를 들 수도 없었다. 무엇인가을 잡으려고 손을 뻗거나 먹을 것을 입으로 가져가려 해도 손이 다른 데로 빗나가버렸다. 손의 움직임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녀의 몸이 '사라져 버린'것이다. 얼굴은 기묘하게 무표정하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턱이 자꾸만 아래로 쳐져서 입은 헤벌어져 있었다.
"뭔가 무서운 일이 생긴 거예요. 몸에 감각이 없어요. 정말 이상한 기분이에요."
요추천자 결과 일종의 급성 다발 신경염인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대단히 드문 유형이었다. 운동장애가 주로 나타나는 갈렝-바레 증후군이 아니라 순수한 감각신경의 염증이었다. 중추신경계통 전체에 걸쳐 척수신경과 뇌신경의 감각성 신경근이 기능을 잃은 것이다.
모든 동작을 하나하나 억지로 힘들게 해야 한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일까? 몸이 없어졌다는 느낌을 안고서 살아가는 인생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토록 처참한 질병에 걸린 후 그녀는 의식적이든 자동적이든 자세를 취하려고 노력하고 그것을 애써 유지했다. 얼마나 반듯한 자세를 취했던지 마치 조각상 같았다. 발레리나가 자세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몸을 사용하는 면에서는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제대로 적응했다. 아무도 경험한 적 없는 상황에 맞서 상상을 뛰어넘는 어려움과 장애를 상대로 싸워 온 것이다.
<침대에서 떨어진 남자>
"이게 내 다리라고요? 설마 내가 내 다리도 못 알아본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사람이 어떻게 자기 다리인지 아닌지도 구별 못하겠어요. 하지만 이 다리는, 이 녀석은... 내 것으로 느껴지지 않아요. 진짜 같지 않아요. 내 몸에 달려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는 대화 중에 자신의 왼발을 '위조된 것'이라고 불렀고 누군가가 정말 '똑같이 만들려고' 무진 애를 썼다며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매들린의 손>
매들린 J. 는 뇌성마비로 인해 앞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평생 집에서 가족들의 시중을 받으며 살아왔다.
원래 손이란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면 반드시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경우에는 이러한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그녀의 두 손은 정말로 무기력했고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다.
원래 그녀에게는 손이나 팔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 식사를 한 적도 없었고 혼자서 변기를 사용한 적도 없었으며 심지어 그녀 쪽에서 손을 내민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다른 사람이 그녀를 도와주었고 그녀는 그저 가만히 있기만 했던 것이다. 그녀는 60여 년 동안 처음부터 두 손이 없는 것처럼 살아왔다.
"매들린에게 식사를 갖다 줄 때는 옆에다 놔두세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위치예요. 무심코 그런 위치에 놓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말입니다. 이쪽에서 항상 먹여주지만은 않는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려는 의도입니다."
어느 날 마침내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가 난생처음 자신의 손을 사용한 순간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1년이 채 안되어 상 베네딕트 병원의 맹인 조각가로서 그 지역 일대에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실로 감동적이고 놀라우며 기적적인 경험이었다.
<환각>
신경학자가 말하는 환각이란 우리 신체의 일부분을 잃었는데도 그 뒤 몇 달이나 몇 년 동안 그것이 끊임없이 느껴지는(혹은 기억나는) 현상을 말한다.
절단 환자의 경우 환각이 대단히 중요하다. 다리가 의족일 경우, 소위 신체 이미지 즉 환각이 의족 부분과 정확하게 들어맞아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면 절대로 만족스럽게 걸을 수 없다.
한 번은 찰스 D.라는 환자를 치료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가 경험하는 것은 사물의 위치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영이었다. 바닥이 갑자기 저 멀리 멀어지거나 코앞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흔들리면서 꿈실 꿈 실 움직이기도 하고, 옆으로 기울기도 하고... 그 결과 다리가 휘청거리고 몸이 앞뒤로 흔들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시선을 밑으로 깔아 발밑을 내려다보면 그제야 진정이 되었다.
<수평으로>
나이가 93세인 멕그레거 씨는 자신만만한 걸음걸이로 민첩하게 걸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몸이 중심에서 20도는 족히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조금만 더 기울어졌더라면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파킨슨병 때문에 그게 고장 나는 일도 생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킨슨병 환자가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몸을 한쪽으로 크게 기울인 채 앉아 있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거울을 보여 주면 자신의 기우뚱한 자세를 깨닫고 얼른 자세를 고친다.
<우향우!>
S부인은 자기 식판에는 왜 후식과 커피가 없냐고 간호사들에게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간호사들이 "부인, 거기 있잖아요. 바로 왼쪽에 말이에요."하고 말해 주어도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지 않았다. 마치 간호사들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후식이 그녀의 오른쪽 시야에 들어오도록 간호사들이 머리를 조심스럽게 왼쪽으로 돌려줘야 비로소 "그래요. 여기 있군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하곤 했다.'왼쪽'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그녀는 회전 휠체어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제 뭔가가 왼쪽에 있다는 것을 알면 그녀는 그것이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오른쪽으로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이 방법을 쓰면 커피나 후식을 찾아낼 수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
언어 상실증 환자가 전혀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는다 해도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다.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이해하는 것은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이다.언어상실증 환자들의 경우,때때로 말하는 사람의 표정을 이해하는 힘을 잃기는커녕 보통사람보다 오히려 뛰어난 힘을 갖기조차 한다.
언어상실증 환자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듣고 속는 일도 없다. 언어를 사용해서 거짓말을 하기는 쉽다. 그러나 표정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언어상 실증 환자들은 그 표정을 간파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면서 폭소를 터뜨렸던 것이다.
2부 과잉
생각해보라.'위험할 정도로 몸상태가 좋다'는 표현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 표현이야말로 바로 '지나치게 건강하다'는 말속에 숨은 양면성과 역설을 나타내고 있다.
<익살꾼 틱 레이>
내가 처음으로 레이를 진찰한 것은 그가 24세 때였다. 그는 몇 초 간격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극심한 틱 증상 때문에 거의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증상은 그가 4세 때부터 일어났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에 심하게 시달려왔다. 틱 증상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이런저런 사단 때문에 참을성 없고, 욕을 달고 사는 데다 심하게 '뻔뻔'스럽기까지 했다.
많은 뚜렛 증후군 환자가 그렇듯이 그 역시 음악성이 뛰어났다. 그의 연주는 단순한 주말 바의 재즈 드러머가 아니라 거의 달인에 가까웠다. 거칠고 돌발적인 그의 즉흥 연주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런 그에게 시험 삼아 할돌을 처방한 결과 소량으로도 그는 균형을 잃고 속도와 타이밍을 놓치고 민첩했던 반사능력을 상실했다. 이런 반응은 약의 효과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약에 지나치게 민감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중요하고도 참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음악이야말로 생계의 수단이자 자기표현의 수단인데 할돌을 사용하면 음악적으로 둔해진다는 것이었다. 틱 증세는 사라졌지만 이제 드럼을 강박적으로 두드리지도 못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느낀 레이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주중에 일할 때는 할돌을 투여하지만 주말에는 중단하고 <익살꾼 틱 레이>가 되어 경박하고 열광적이고 영감에 가득 찬 인물로 변신한다.
<큐피드병>
이 병을 치료하고 싶은지 아닌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병이라는 것은 알지만 병 때문에 기분이 좋으니까 말입니다., 나는 그런 기분이 좋았어요. 그리고 지금도 좋아요. 그런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그 덕분에 이십 년 동안 느끼지 못했던 원기를 느끼고 기운까지 팔팔하니 말이에요. 우습지요. 이게 모두 큐피드 덕분이라니 말이에요.
<정체성의 문제>
톰슨 씨는 단 5분 사이에 나를 거의 열명의 다른 사람과 착각했다. 그는 이것저것 추측해서 되는대로 내뱉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한 번은 톰슨 씨가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는 호텔 프론트에 자신의 이름을 윌리엄 톰슨 목사라고 사인하고 택시를 불러 밖으로 나섰다. 택시기사는 말했다.
"그는 마치 세상 모든 곳을 여행했을 뿐만 아니라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 없고, 만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단 한 사람의 인생에 그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대답했다.
"단 한 사람의 인생으로는 결코 그럴 수 없지요. 정말 기묘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정체성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뚜렛 증후군에 사로잡힌 여자>
나는 60대로 보이는 백발의 노부인에게 눈길이 사로잡혔다. 그냥 보기에도 노부인은 뭔가 심한 혼란 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녀는 사람을 지나칠 때마다 틱 증상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를 악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흉내 내고 있었다.아니,단순히 흉내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희화화하고 있었다고 말해야 옳다. 1초 아니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든 습관을 알아차렸다. 한 블록 정도의 짧은 거리를 지나가는 동안 극도로 흥분한 이 노부인은 4,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흉내 냈다. 이 노부인은 그 누구의 흉내도 낼 수 있었다. 흉내를 냄으로써 자기 자신은 사라졌기 때문에 결국 그녀는 그 누구도 될 수 없었다.
3부 이행
<회상>
C부인의 간질은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났다. 첫 번째 특징은 관자엽에 생긴 중풍으로 인한 발작이 72시간이나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두 번째도 역시 생리학적 원인에 기인한 것인데, 발작을 동반한 극도로 강렬한 감정(그리고 깊은 항수)이 일어나 다시 한번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픈 감정이 일어난 것이다. 오랜 세월 입고 있었던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만나고 어머니의 팔에 안기고 싶다는 기분을 느낀 것이다. C부인의 경우, 옛 기억을 떠올리고 싶다는 욕구가 마음 깊숙한 곳에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그녀가 다섯 살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이미 90년 가까이 살았고 길고 길었던 고독한 인생도 이제 막을 내리려고 하는 C부인에게 어린 시절의 '신성하고 귀중한'기억을 되살려주는 것, 이 신기하고 기적과도 같은 회상은, 어린 시절 기억의 상실이라는 문을 부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뇌에서 일어난 장애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인도로 가는 길>
"꿈꾸는 게 괴로운가요? 그렇다면 다른 약을 쓸 수도 있어요."
"아니요. 나는 그런 꿈이 좋아요. 고향으로 돌아간 것 같은걸요."
바가완디 P. 는 악성 뇌종양에 걸린 19세의 인도 소녀이다. 18세에 종양이 다시 발병해 악성이 되자 이제 더는 제거할 수 없게 되었다.
바가완디는 이제 더 이상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사흘 후, 그녀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인도로 가는 여행을 이제 막 끝냈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내 안의 개>
"내 자신이 개가 된 꿈을 꾸었어요. 그건 냄새의 꿈이었어요. 그리고 지금 잠에서 깨어보니 냄새로 가득한 세계였어요. 다른 감각들도 모두 전보다 강화되었지만 후각에 비할 바는 아니었어요."
"향수 가게에 들어갔어요. 전에는 코가 그렇게 예민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향수 냄새를 금방 구별했어요. 향수 냄새 하나하나가 각각 독특했고 뭔가를 생각나게 해 주고 아무튼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는 사람의 감정도 냄새로 알 수 있었다. 두려워하는지, 만족하는지 그리고 여자인지 남자인지까지... 마치 개처럼 말이다. 그에게 냄새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미의식과 판단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요소가 되었다.
<살인>
도널드는 PCP를 복용한 몽롱한 상태에서 야인을 죽이고 말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살인을 했다는 기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범죄자인지 아니면 정신이상인지가 분명하게 판별되지 않은 채, 도널드는 정신이상이 있는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병원에서 4년을 보냈다.
5년째 접어들어 주말 외출을 하락받자 그는 바깥바람을 쐬기 시작했다. 그러나 외출 중 머리에 심한 중상을 입었는데 이때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는 전혀 없었던 기억 -혹은 잊혀졌다고 여겨진 기억 -이, 최면술과 최면주사를 사용해도 되살아나지 않던 그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실제로 저질렀던 살인이 기억상실에서 반전을 이루어 떠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연유에서였을까? 신경학의 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기묘한 이야기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다.
<힐데가르트의 환영>

황홀 상태에서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환영에 대해 신을 향한 경외심과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가꾸어가는데 도움을 받았다.
4부 단순함의 세계
우리는 지적장애인이 가진 마음의 '질'을 인정해야 한다. 과연 지적장애인들에게 특징적인 마음의 질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구체성'이다. 그들의 세계는 생기 있고 정감이 넘치고 상세하면서도 단순하다. 왜냐하면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시인 리베카>
아는 사람의 소개로 리베카가 우리 진료소를 찾아왔을 때 19세의 어엿한 처녀였다. 할머니의 말을 들으니 리베카에게는 '공간감각이 없는 듯'했다. 오른쪽과 왼쪽을 구별하지 못했고, 옷의 겉과 안, 앞과 뒤도 구별할 줄 몰라 거꾸로 입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리베카는 일상생활 속의 간단한 설명이나 가르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심오한 의미를 지닌 시 속의 비유와 상징을 이해하는 데는 거의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녀는 돌연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능이 낮은 데도 아주 적절한 예를 들어(이는 항상 감탄하는 바이지만) 진료소의 양탄자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살아있는 양탄자와 같아요. 양탄자에 있는 것과 같은 무늬와 디자인이 필요해요. 디자인이 없으면 뿔뿔이 조각나고, 그것으로 끝이에요."
그녀는 후에 의미 있는 일을 찾아냈다.'연극'과 극단은 그녀의 인생이 되었다. 그녀는 놀라울 장도로 연극을 잘 소화했다. 맡은 역을 연기할 때는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
<살아있는 사전>
61세의 마틴 A. 는 파킨슨병에 걸려 이미 혼자서는 자신을 돌볼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수막염에 걸려 사경을 헤매었고 그로 인해 정신지체가 되고 말았다.
그는 음악에 대해서는 놀라운 기억력을 자랑했다. 그의 기억력은 음악 그 자체뿐 아니라 연주에까지 미쳤다. 그는 살아있는 사전으로서 다소간의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54년에 출판된, 전 9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그러브 음악, 음악가 사전>을 암기했다. 아버지는 그로브 사전을 아들에게 읽어주었다. 6,000쪽을 모조리 읽어주었다. 마틴은 읽고 쓸 줄을 몰랐지만 아버지가 읽는 내용을 모두 기억용량이 무한한 대뇌피질에 기억했다.
<쌍둥이 형제>
1966년 내가 주립병원에서 쌍둥이 형제 존과 마이클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쌍둥이는 당시 26세였으며 7세 때부터 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들에 관한 진단은 자폐증, 정신병, 중중의 지적 장애 등 가지각색이었다. 이 쌍둥이는 기억력이 비상해서 그들이 경험한 것은 아주 사소한 내용까지도 정말 훌륭하게 기억한다. 나아가 과거나 미래의 어느 날이 무슨 요일인지 물어보면 그 자리에서 대답해준다.
300자리 숫자 혹은 과거 40년간에 일어난 수천억이 넘는 엄청난 양의 사건을 어떻게 머릿속에 담고 있는지를 물으면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그냥 볼뿐입니다."하고. 내가 보기에 이 쌍둥이의 눈앞에는 비할 데 없이 커다란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는 게 분명하다.
쌍둥이 형제를 두 번째로 보았을 때는 둘이서만 숫자와 관련된 기묘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는 듯했다 (....) 역시 생각한 대로였다. 쌍둥이 형제가 주고받았던 6 자리 숫자는 모두 소수였다 (.....)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나는 숫자표 책을 몰래 들여다보고 꾀를 써서 책에 있는 10자리의 소수를 말했다.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드디어 존이 경이로운 정신집중을 거듭한 끝에 12자리 숫자를 말했다. 나는 더 이상 확인할 방법이 없어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폐증을 가진 예술가>
그러면 호세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8세 때 고열에 시달리면서 끊임없이 발작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급성 뇌손상 및 자폐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그는 지하실에 살면서도 내면세계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그는 사진잡지, 특히 <내셔널 지오그래픽>처럼 박물지 성격의 잡지에 흥미를 보였다. 그리고 발작을 일으키고 호되게 꾸지람을 받는 생활의 반복 속에서도 연필을 발견하고 그림을 그렸다.


자폐증 환자이자 지능도 뒤떨어진 그가 그체적인 것 그리고 '형태'에 대해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독자적인 스타일의 자연주의자이자, 자연파 화가였다. 그는 세계를 '형태'로 표현했다. 다시 말해서 사물을 조는 순간 강렬한 느낌을 받아 그것을 그대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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