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2007년 7월 24일 세례를 받았다. 일본 복음화를 위한 문화선교집회인 '러브 소나타' 도쿄 대회 현장에서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평생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이 지금까지 쌓아온 인본주의적인 작업을 뒤로하고 지성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이는 이 책의 저자 이어령님이 세례를 받고 난 이후 발췌한 신문기사입니다. 그가 인터뷰에서 세례 받기 전과 후와 비교해 어떤 삶을 살고 있고 그의 느낌이 어떠냐는 질문에는 제게 새로운 문이 열린 것인지, 벽이 생겼는지는 아직 모르겠다는 진솔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첫번째 제1부 [교토에서 찾다]에서는 일본 교토의 산기슭의 언덕 위에 서 있는 연구소의 숙소에서 생활하면서 겪었던 외로움이 주된 정서입니다. 이때는 그가 세례 받기 3년 전입니다. 교토에서의 1년은 그가 지성에서 영성으로 향한 첫 번째 계단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는 골방에서 드린 무신론자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븐일레븐에서 산 식빵을 가슴에 품고 돌아오던 골목길의 어둠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나는 종교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하지만 그것이 세속에 얽매인 끈에서 벗어나 영혼을 해방시키려는 욕망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소유의 끈, 정의 끈, 육신의 끈, 모든 욕망의 끈을 놓아야만 합니다. 내가 망명객처럼 잠시 내 집과 내 나라를 떠나 이곳에 온 까닭도 그러한 목걸이의 끈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같았으면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시선의 구속을 느꼈겠지만 여기에서는 아주 자유롭습니다. 누구도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들개처럼 뛰어다닐 수가 있습니다.
감기가 아내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객지에서 한 달 가까이 혼자 감기를 앓으면서 느낀 것은 인간은 혼자서 병을 앓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이었지요. 누군가 가까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 자기 병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존재는 병이고 병을 통해서 우리는 남과 어울립니다. 병을 앓게 되면 자신이 혼자인지 아니면 남과 함께 살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호사다마가 아니라 다사 호사도 있는가 봅니다....... 결국 종교와 가장 가까운 것이, 인간이 종교에 다가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 병이라는 생각에 머리맡의 체온계를 치웠습니다. 모든 병 속에는 종교의 광맥이 묻혀있다고 생각하면서.
지성에서 영성으로 라는 책 제목만 보면 왠지 딱딱한 종교서적 일것이라 생각했는데 예기치 않게 정말 따뜻한 감성을 자극하는 힐링 에세이 같습니다. 문체도 마치 멘토가 바로 옆에서 따뜻한 말씨로 차근차근 얘기해 주 듯하고 공허했던 마음에 희망의 빛 같은 문장들이었습니다. 이기적인 생각을 내려놓고 잠시나마 이타주의로 전환하는 계기도 된 책입니다.
젊은 시절,어느 종교도 믿지 않던 내가 그래도 부처님보다 예수님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틴토레토의 그림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연화대 위에 가부좌를 하신 부처님과는 달리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너무 안타깝게도 갈비뼈가 드러나 보입니다.
우리는 연화대에 가부좌를 한 마른 예수님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부처님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고뇌와 해탈-나는 아직 고뇌의 편인데도 살이 많이 쪘으니 예수님 보기가 민망합니다. 젊은 시절, 나는 자코메티의 조각처럼 말라 있었지만, 예수님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살이 찌고서야 예수님을 찾는 것이 보통 아이러니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신론자였던 그가 기독교로 귀의하게 된 계기는 딸(장민아 변호사)의 역할이 컸습니다. 딸은 암과 시력장애, 그리고 아이의 문제를 모두 신앙심으로 극복한 사람입니다. 그가 딸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기적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건 아니라고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한발 한발 가까이 다가서는 모습이 드라마처럼 극적이지는 않지만 성경에서 부활, 영생, 하늘의 무한사랑을 서서히 깨달아가는 모습이 가슴 뭉클했습니다.
딸의 실명위기 소식을 듣고 다급히 딸이 있는 하와이로 달려갔습니다. 아이 문제로 아이가 학교를 하와이로 옮겨 생활하다가 다급한 연락을 받은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오, 하나님"소리가 나왔습니다. 이 애가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된다면, 어머니의 웃는 얼굴과 아버지의 미소를 보디 못한다면 이 집에 있는 것, 산과 바다와 길거리 색채가 있는 모든 것, 형태가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주님의 딸에게 어찌 그러실 수 있습니까.
너무 하세요. 저렇게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따르는 당신의 딸에게 왜 그 많은 수난을 내 리시는요. 암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실명입니까. 아픈 아이 때문에 학교를 찾아다니느라 눈물이 마르지 않은 아이에게 무슨 눈물이 남아 있기에 또 울리십니까.
민아는 태연하게 말했습니다."걱정 마요. 아무개 목사님은 어려서 실명하신 분인데도 우리보다 더 잘 보셔. 더 많은 것을 보실 수 있다고 했어요. 늘 밤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그 깜깜한 세상에서도 낮에 본 모든 형상과 빛이 보이지 않나요? 아버지의 얼굴, 어머니의 손, 소리가 말해주고 냄새가 느끼게 하는 걸요. 아빠 엄마가 걱정할까 봐서 그렇지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빠 정말 그렇죠.'사랑'은 '설명'이 아니지요? 외쳐야만 되돌아오는 산울림 소리가 아니지요? 잘났든 못났든 아빠가 절 사랑해주시는 것은 복잡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제가 딸이니까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것처럼 우리에게 생명과 영혼을 주신 하나님도 그럴 거라고 믿어요. 다만 제가 아빠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그 사랑과 은혜를 제대로 느낄 줄 몰랐던 것뿐이지요. 그것을 깨닫고 나서야 편안한 삶이 돌아오게 된 것이죠.
- 딸에게서 온 편지 중에서 -
제3부 한국에서 행하다 에서는 지성인인 그가 지성과 영성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 제비 이야기를 하는 단락이 나옵니다. 제비는 또한 전래동화 흥부놀부에서도 나오는 친근한 새입니다. 한국적인 전래동화 이야기에 빗대어 지성과 영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읽고 나니 이해가 절로 됐고 정말 감탄스러웠습니다.
제비들은 다른 새들과 다르게 사람 집에 집을 짓고 살아갑니다. 믿고, 안심하고, 잡아먹힐 각오를 하고, 제일 가까운 안채에 떡 하니 집을 짓는 제비를 어떻게 잡아먹을 수 있겠습니까?
제비처럼 믿어야만 인간의 힘을 빌려 다른 짐승들의 위협에서도 보호를 받고 편안하게 살 보금자리를 얻어 새끼들을 안심하고 키웁니다. 심지어 다리가 부러져도 흥부가 와서 치료를 해주기도 하지요. 그런데 놀부를 보세요. 흥부가 부자 되었다고 하니까, 일부러 제비 발목을 분지르고 나서 고쳐주지만 얻은 것은 재앙뿐이었지요.
4부에서는 기독교적인 감동과 메시지를 독자로 하여금 기독교적 감성이 그대로 전해져서 눈물 날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전한 한 줄의 고백은 ~~
지성에서 영성으로. 너의 기도가 높은 문지방을 넘게 했다.
신앙을 가지면서 번뜩이는 감각, 냉철한 비판력이 약해지는 것은 아닌가 묻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거꾸로입니다. 내 작은 머리에서 나온 언어와 판단이 더 큰 영성에 의지한다면 지성이나 두뇌 순발력이 더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지성을 넘어서는 거니까, 지성을 버리는 게 아니라 넘어서는 거니까요. 영성을 얻기 위해 지성을 버려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지성은 깨달음으로 가는 사다리입니다. 예수님이 왜 육체로 왔습니까? 육체로 왔다는 것은 육이 지닌 욕망, 잘난 척하는 지성, 변덕스러운 감정, 이기적인 본능을 다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오신 거지요. 우리와 똑같은 육의 조건 속에서도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한 것이지요.
나처럼 먹물에 찌든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백 퍼센트 신자는 못됩니다. 하루에도 몇 번 밤에 자다가도 불현듯 회의와 참회를 거듭하면서 살지요. 문지방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자신이 딱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빛과 어둠 사이의 황혼이 아름답듯이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의 문지방에는 긴장의 노을이 있습니다.
- <주부생활>2007년 9월호 기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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